발칙한 가출
- 사진집 '붉은 소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발을 집으로 내딛자 거실 중앙에 보란 듯이 턱 하고 자리 잡은 붉은 소파가 눈에 보인다. 그 소파는 마치 자기가 거실의 주인이라도 된 것 마냥 항상 건방지게 거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 그 소파에게 어떤 불평도, 딴죽도 걸지 않았다. 그게 소파의 당연한 임무요, 어떻게 보면 소파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어느 날 그 붉은 소파가 사라져버렸다. 분명히 변함없이 건방지게 거실을 차지하고 있어야 할 그 소파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있어야만 하는 것이 없으니 거실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나는 어이가 없었고 어리둥절했다. 붉은 소파가 가출을 한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바란다. 내가 그 누구보다 특별했으면 좋겠고 남과는 다른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다는 말은 기분 좋은 뉘앙스보다는 ‘당신은 남들과 똑같은, 다르지 않은 그런 사람인 걸요’ 하는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듯 당연히 소파라는 것은 거실에 있어야 하고 거실을 벗어날 수 없는 물건이다. 그게 ‘평범한’ 소파의 임무라면 임무인 것이다. 그런데 ‘붉은 소파’는 소파의 모습이라기엔 어딘가가 이상했고 불편함이 가득했다. 소파가 밖에 있는 것도 껄끄러운데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소파’ 라는 표현은 상당히 낯설기만 하다. ‘붉은 소파’는 무려 30년 동안 가출을 감행했고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소파를 거쳐 갔다. 소파에 앉은 사람들의 인종, 직업, 사회적 지위는 다 제각기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로 그들은 모두 달랐다. 그들은 각각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거실로부터 가출에 성공한 붉은 소파. 소파가 감행한 그 기나 긴 가출의 의미는 단순히 사람들이 소파에 앉았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30년 동안 곳곳의 사람들이 거쳐 간 그 소파는 어쩌면 더 이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파의 의미에서 탈피해 있는지도 모른다. 거실에서 벗어나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품을 내 준 소파는 그 스스로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된 듯 했다. 그리고 사람을 안고 있는 소파는 자신이 안고 있는 그 누군가가 꿋꿋이 견뎌 온 시간을 비추고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소파는 스스로 어떤 이가 달려온 시간의 그림자가 되었고 소파가 비추는 시간의 그림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 ‘붉은 소파’는 우리가 아는 그 흔하디흔한 소파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파의 가출을 감행해가면서까지 저자는 무엇을 그토록 말하고 싶었을까? 저자는 사람들을 소파에 앉힘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울타리를 짓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는 그 울타리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에게 붉은 소파란 그런 울타리를 만들 수 있는 작은 실마리였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소파에 앉은 사람들의 차이들이 끝내 좁혀지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 사이에 울타리를 지으려 한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해 보인다. 소파에 앉은 사람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비추고 있으니 말이다.
집을 나갔던 붉은 소파가 돌아왔다. 기나긴 시간의 끝을 달려 다시 거실로 되돌아 온 소파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색도 꽤나 많이 바랬거니와 건방지게 거실을 차지했던 그 소파는 어느 새 칙칙한 인생의 여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시간만큼이나 그 소파에 담긴 이야기도 쌓인 것일까. 소파는 다시 예전의,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느 소파들과 같지는 않았다. ‘붉은 소파’는 다른 소파들처럼 자신이 거실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려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는 붉은 소파에 앉아 본다. 그리곤 긴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온 소파가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를 쫑긋 기울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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