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딸깍.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 가기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펜과 샤프펜슬을 꺼내 든다. 펜의 잉크는 막힘없이 술술 나온다.
샤프펜슬의 촉에서는 샤프심이 빼꼼 얼굴을 내비쳐야 하지만 샤프심은 자신의 얼굴을 내비쳐주지 않는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나는 샤프펜슬 안에 샤프심을 채워 넣는다. 다 자라버린 내 손엔 지금 연필은 없다.
하지만 내게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겨우 겨우 연필을 손에 쥔 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갔던 그 때가 있었다.
제각각 저마다 다른 크기로 필통 안에서 뒹구는 몽당연필을 떠올릴 때면 나는 자꾸만 시간을 돌리게 된다.
마저 내 손이 다 자라지 않았을 때 내 손에 쥐어져있던 연필이 나를 그 시간으로 자꾸만 데리고 간다.
내 손과 내 키와 내 몸은 점점 더 자라고 더 커져갔지만 내가 쓰던 연필의 키는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훌쩍 커져버린 내 손에 작아져 뭉툭해져버린 연필은 더 이상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수차례 깎여 제 몸을 거의 다 내줘버린 몽당연필은 내 관심에서 벗어났고 한 동안 필통 한 구석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몽당연필을 버리지 못했다. 나와 그 몽당연필 사이에 둘 만의 추억이라도 있는 것 같았고 그 추억의 부스러기를 버릴 수는 없었다.
기다랗고 멋진 본새를 자랑하던 연필이 볼품없이 작아져버린 것이 온전히 내 탓 같았고 괜스레 미안해졌다. 지금 내 필통 안에 몽당연필은 없다.
다만 펜과 샤프펜슬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작아지지 않는다. 점점 더 몽당연필이 되어가던 연필과는 달리 펜과 샤프펜슬은 변하지 않는다. 그대로일 뿐 이다.
몽당연필의 키가 작아질수록 추억은 더 깊어지고 시간은 짙어진다. 연필을 깎는 것처럼 나는 나와 내 사람사이에 있는 추억의 껍질을 깎는다. 연필의 끝이 뭉툭해지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의 끈도 닳고 닳는다.
몽당연필은 추억의 흔적이며 더 단단해지는 인연이다. 키가 작아지지 않는 펜보다 자꾸만 고개를 숙이며 작아져가는 몽당연필에게 더 정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까.
몽당연필은 나를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난 참으로 오랜만에 내 깊은 곳에 쳐 박혀 두었던 몽당연필을 꺼내어 인연의 끈을 되짚어 본다.
내 곁엔
몽당연필 같은 사람이
항상 있어 왔다.